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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파리의 심판이 보여주는 세상을 바꾸는 사람에 대하여

김남필lSeptember 15, 2020l Hit 1822


           1976년 5월, 그 한 달 안에 전세계 와인업계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이 터져버렸다.

 

           당시 파리의 여러 와인 샵 중 하나를 운영하고 있던 스티븐 스퍼리어(Steven Spurrier)는 새로 소개받은 캘리포니아의 와인들을 홍보하기 위해서 한 행사를 준비했다. 파리의 가장 뛰어난 소믈리에들을 모아 놓고 프랑스의 와인들과 캘리포니아의 와인들을 블라인드로 비교 시음하는 행사였다. 이 시대의 통념으로는 와인의 으뜸은 당연히 프랑스였고 미국과 같이 와인의 역사가 짧은 나라와 비교하는 것은 신성모독에 가까웠다. 실제로 행사에 대해서 알게된 모든 사람들이 결과는 안 봐도 뻔한 것이라고 생각했었고, 그 때문인지 행사는 관계자 외에 구경꾼 하나 없었고 취재하기 위해 참석한 기자는 조지 태버(George Taber) 타임지 기자 단 한 명 뿐이었다. 태버도 사실은 참석을 시간낭비라고 생각했지만 스퍼리어와의 친분 때문에 참석을 한 것이었고, 행사가 시작하자마자 그는 차츰 집에 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 한 마디가 그의 발걸음을 멈춰 새웠다. “아!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구나!” 한 소믈리에가 탄성을 질렀다. 그는 맛없는 미국 와인을 시음하다가 이제서야 프랑스 와인이 등장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태버는 그 소믈리에와 다르게 각 와인이 어떤 와인인지 정보를 제공받았었고, 그가 프랑스 와인이라고 칭송한 와인이 사실 캘리포니아 와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에 흥미가 생긴 태버는 다시 자리에 착석하였고 열심히 경청하기 시작했다.

           행사의 마무리 시점에서 시음한 와인들의 정체가 공개되자 모든 참석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화이트 와인과 레드 와인 각 부문의 1등이 모두 캘리포니아 와인으로 선정이 된 것이다(궁금하신 분들을 위해서 화이트는 1973 chardonnay from Chateau Montelena이고 레드는 1973 cabernet sauvignon from Stag’s Leap Wine Cellars이다). 참석자들은 주최자가 자신들을 함정에 빠뜨렸다면서 분노했고 스퍼리어는 그 이후로 수 년간 프랑스 언론과 주류업계로부터 현상수배범과 같이 도망을 다녀야 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파리의 심판”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사건의 결과를 사람들이 받아드리게 되었다. 미국의 와이너리들과 교류가 이 사건 이후로 촉발되면서 프랑스의 와이너리들의 기술력이 너무 낙후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자명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를 계기로 최고의 와인은 프랑스에서만 만들 수 있다는 통념이 깨지게 되면서 전세계적으로 와이너리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이들 모두가 눈치 보지 않으면서 새롭고 혁신적인 방법으로 와인을 만들 수 있었다. 덤으로 프랑스의 와이너리들도 전통에 더이상 얽매이지 않고 혁신을 받아들이면서 프랑스 와인의 품질 또한 높아질 수 있었다.

           최근 들어 다양한 종류의 창의성을 키우는 교육 프로그램들이 생겨나고, 통념에 얽매이지 않은 열린 사고를 중시하는(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문화가 발전하였다. 하지만 창의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바꾼 예시들은 언제나 대단한 철학자나 과학자, 사업가와 같은 위인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과연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개인적인 의문이 해결이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평범한 와인 샵 주인 한 명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전세계 와인 업계를 뒤흔들 수 있다면, 그 어떤 분야에서 그 누구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훗날 와인을 마실 일이 생긴다면, 마시고 있는 그 와인도 파리의 심판으로 인해 새롭게 생겨난, 혹은 그에 영향을 받은 와이너리에서 생산되었을 확률이 굉장히 높다. 그 와인을 음미하며 본인을 포함해서 그 누구나 세상을 바꿀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되새기면 더 의미있는 밤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Comment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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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윤진
    정윤진
    2020-09-16 16:12:44
    굉장히 재밌는 일화네요.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꿈으로 시작하지만, 나이가 들고 여러가지를 직접 경험해보면서 그 꿈이 한없이 작아지기 마련인데 굉장히 큰 힘이 되는 일화인 것 같습니다.
    학창시절에 꿈은 동사형으로 가지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명사형이라면 성공여부가 on/off가 되겠지만, 동사형이 되는 경우에는 아무리 경미하게라도 이뤘을 수 있고 아무리 크게 이뤘더라도 멈추지 않고 더 이룰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나도 항상 세상을 바꾸고 있고 더 바꾸기 위해 나아가겠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남필이 글에 의해서 제가 깨달음을 얻고 제 삶이 바뀐다면, 그것도 남필이가 글을 통해 작은 세상을 바꾼 거니까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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